밑줄친 이야기

인생이 그림 같다 =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

keepthesunshine 2011. 4. 9. 13:25

 

 

 

<인생이 그림 같다> (2005)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 (2006)는 <인생이 그림 같다>가 장정이 바뀌고 도판이 보완된 책

손철주 /  생각의나무

 

 

이쾌대, <상황>, 1938년

캔버스에 유채, 160.0X130.0cm, 개인소장

 

(오랜만에 보는 이쾌대의 그림) 

 

 

정선, <박연폭포>, 조선 18세기

종이에 수묵, 119.4X51.9cm,  개인소장

 

보는 그림이 아니라 듣는 그림이다.

시각예술에서 청각 예술로 돌변한 그림이다.

 

(동감! 나도 이젠 그 소리가 조금 들리는 듯하다는...ㅋ)

 

 

정선, <내연산삼룡추>, 조선 18세기

종이에 수묵, 134.7X56.1cm,  호암미술관

 

이 그림도 물소리 콸콸하다.

몇 구비 돌아 나는 물길이 직하하는 폭포보다 격렬하다.

 

(콸콸거리는 저 물소리, 들리나요?...ㅋ)

 

 

김홍도, <병진년화첩> 중에서 <소림명월도>, 1796년

종이에 수묵, 26.7X31.6cm, 보물 제782호, 호암미술관

 

 

김정희, <불이선란>, 1853년 경

종이에 수묵, 55.0X31.1cm, 개인 소장

 

 

강세황, <난 그림>, 조선 18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24.0X16.0cm, 국립중앙박물관

 

 

임희지, <묵란도> 부분, 1747년

종이에 수묵, 35.5X41.7cm, 서울대박물관

 

 

김지하, <란이 바람을 타는가, 바람이 란을 타는가>, 1986년

종이에 수묵, 30.0X360.0cm, 개인 소장

 

(같은 소재가 그린 이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치바이스, <연꽃과 개구리>, 1954년

종이에 채색, 베이징 영보재

 

가난한 시골 목수 치바이스는 글공부에 목말랐다.

그의 손재주를 눈여겨 본 스승 후친위안은 조각칼 대신 붓을 쥐어줬다.

스승은 "네 실력이면 그림 팔아서 글을 배울 수 있겠다"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 추임새에 힘을 얻은 치바이스는 수만 점의 그림을 그렸고 중국 근현대 미술계의 최고봉에 올랐다.

스승이 타계하자 제자는 회고했다.

"그 어르신은 은사일 뿐만 아니라 내 평생의 지기였다.

길고 긴 이별을 고하니 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스승의 영전에서 제자는 자신의 작품 20여 점을 꺼내들었다.

생전에 스승이 칭찬해준 그림들이었다.

제자는 분향하듯 그 작품들을 불살랐다.

스승에 대한 치바이스의 추모는 감동적이다.

그 아름답던 사승(師承)의 관계를 요즘 다시 볼 수 있을까 싶다.

백수 가까이 장수한 치바이스의 장례식은 요란했다.

당대의 학자요 정치가인 궈모뤄가 장례위원장을 맡고 저우언라이 총리가 참례했다.

치바이스는 삼나무로 만든 자기 관에 넣을 부장품을 미리 일렀다.

그것은 그의 이름과 본적을 새긴 돌 도장 두 개,

그리고 서른 해 동안 그가 들고 다니던 붉은 색 지팡이였다.

그는 비명도 미리 써 두었다.

'샹탄 사람 치바이스의 묘'라고 돼 있었다.

지난 세기 중국 화단을 주름잡았던 치바이스는 그토록 다정하고 소박한 시골 늙은이였다.

치바이스의 한글판 자서전 『쇠똥 화로에서 향내 나다』는 콧등이 찡한 책이다.

원제목이 '백석노인자술(白石老人自術)'인 이 책의 번역자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모습을 닮은 것 같기도 한, 마음속 고향 같은 노인의 얼굴이

나의 시선과 마음을 한참 동안 놓아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책 첫머리에서 치바이스는 이렇게 회상한다.

"가난한 집 아이가 잘 자라 어른이 되어 세상에서 출세하기란

진정 하늘에 오르는 것만큼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나는 궁핍한 시절을 경험한 세대의 향수가 걸출한 작품으로 승화된 예를 치바이스에게서 찾았다.

'궁기'는 궁상맞지만 가족의 사랑에 불을 지피면 '향내'를 풍긴다.

치바이스의 조부는

"아이를 품에 안고 따뜻하게 재우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느끼는 사람이다.

양식이 떨어지면 빈 아궁이에 빗물이 고이고 거기에 개구리가 뛰노는 집안이지만

어머니는 토란 구워 먹는 구수한 맛을 가르쳐준다.

날마다 글씨만 쓰려고 하는 손자를 보고 할머니는 "어디, 솥에 글을 끓여 먹는다더냐" 하며 걱정하지만

그 손자가 초상화를 그려 돈을 벌자 "이제 보니 그림을 솥에 넣고 끓이는구나"라고 말한다.

가난은 치바이스에게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를 걱정하게 만들었지만

어떤 그림이 사람을 따뜻하게 만드는지를 알게 했다.

그는 "말을 하려면 남들이 알아듣는 말을 해야 하고,

그림을 그리려거든 사람들이 보았던 것을 그려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치바이스의 화실을 둘러본 적이 있는 화가 김병종은 자신의 여행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더 자극적인 것, 더 새로운 것을 좇는 우리 눈의 버릇은 미술판이 유독 심한 것 같습니다.

슬프게도 옛 대가 치바이스가 이룬 세계 또한 오늘의 하학생(畵學生)들에게는

한갓 시골풍의 옛 그림으로 비쳐지는 것은 아닐까요."

치바이스가 그린 '시골풍의 옛 그림'은 그러나 배부른 추억을 가진 자는 결코 그릴 수 없는,

빈천한 자를 위로하는 그림이다.

그가 94세에 그린 <연꽃과 개구리>를 보자.

때는 가을.

폭염 속에 짙푸름을 뽐내던 연잎은 시절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하지만 선홍빛 연꽃은 가버린 여름을 짝사랑했는지 여지껏 단심(丹心)이다.

연밥은 농익어 건드리면 '톡'하고 구를 것 같다.

개구리 세 마리가 그 아래서 머리를 바짝 치켜든 채 회담 중이다.

그들은 한 시절 울어 예며 잘 보냈지만 다가올 가을살이가 걱정이다.

치바이스는 선홍색, 갈색, 노란색, 회색, 검은색, 연녹색을 죽 펼쳐놓으며 사연 많은 생물의 기억들을 일깨운다.

삶의 순환도 계절의 무상함처럼 영고성쇠의 가두리에서 벗어나기 힘들지만

추억은 지워지지 않아 뒤에 올 사람을 따뜻하게 쓰다듬는다.

시골뜨기 목수 출신 화가 치바이스의 그림에서 피어오르는 향내는 추억의 고슨내다.

 

 

☞ 치바이스(齊白石, 1860~1957)

중국 청말과 현대에 걸친 화가

40세 무렵까지 고향에서 소목장(所木匠) 일을 하면서 생계 유지를 위해 그림을 그리다가

화초, 영모, 초충의 명수로 이름을 떨친다.

50세 이후 베이징으로 이사하여 미술대학 교수를 지냈다.

점차 석도, 서위, 팔대선인 등 양저우계(楊州系) 화풍으로 변모했고,

자유롭게 감흥을 표현하는 중국 문인화의 도미를 장식하였다.

<화훼화책(花卉畵冊)> <하엽도(荷葉圖)> <남과도(南瓜圖)> 등이 있다.

 

 

 

강서 중묘의 현실 남쪽 벽에 그려진 주작, 고구려 6세기말~7세기

북한 남포시 강서 구역

 

(시공간을 넘어선......

...그저 감동!)

 

 

위) 반 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년

캔버스에 유채, 50.5X103.0cm, 암스테르담 반고흐국립미술관

 

아래) 이중섭, <달과 까마귀>, 1954년

종이에 유채, 29.0X41.5cm, 호암미술관

 

수평에 안착하고자 하는 이중섭의 까마귀와 앉을 곳을 몰라 헤매는 반 고흐의 까마귀,

두 화가의 영혼은 지쳤으나 살아서 편안한 숙면에 들지 못했다.

 

 

최순우가 오대산 상원사 동종에 새겨진 비천상을 탁본하고 제문을 썼다.

눈 내린 신춘 어느 날, 일몰의 오대산에 억지로 올라갔다가 탁본했다는 내용이다.

 

 

양해, <이백행음도> 부분, 12세기~13세기 초

종이에 수묵, 80.8X30.4cm, 도쿄국립박물관

 

양해는 술을 좋아했다.

사람도 그리고 귀신도 그렸다.

몇 가닥 안 되는 필선으로 대상을 잡아내는 표일한 감필법을 자랑했다.

나라에서 금을 만든 허리띠를 내려주었지만 조정에 걸어놓고 뛰쳐나왔다.

이 그림은 이백이 시를 읊으며 걷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