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어주는 남자와 33인의 화가>
박세당 / 북성재 / 2010
헝겊을 찢어 살포시 눌러붙인 듯 포근한 질감을 가진 색채의 마술사
가국현, <열정>
('검은 드레스에 새빨간 열정을 얼굴삼아 한 여자가 나를 향해 활짝 웃고 있'는 듯 느껴지나요?)
(그러고 보니 꽃은 얼굴인 듯, 화병은 여인의 몸인 듯...)
이 화가의 주체할 수 없는 끼를 누가 말리랴
흥과 페이소스의 작가
구병규, <쟁기질 하는 소> (위)
구병규, <도원의 꿈> (아래)
(같은 화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자세히 비교해보시길.)
---------
샤갈을 울린 남자가 색깔로 그려낸 환상교향곡
김석중, <일상생성 2>
김석중, <일상생성 3>
어머니, 그 그리움의 원형질을 극사실 기법에 실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전달하는 작가
김순겸, <기억 넘어 그리움 - 목련꽃이 피었습니다 1>
이 화가의 목련꽃은 국내 최고 수준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주목받을 만큼 정교하면서도 생생하다.
풍부한 인문지식을 바탕으로 한 동양적 판타지를 이름다운 극사실로 그려내는 화가
김영일, <농금명월>
농금명월이라! 밝은 달빛 아래 가야금을 타고 인생을 즐긴다는 뜻이나 제목 한번 운치 있다.
이것을 그림으로 어떻게 풀어가려나 했더니,
화가는 장미와 가야금으로 풀었다.
미황색의 장미로 가득 찬 배경 위에 가야금의 양이두(머리 부분)와 염미(부들)의 측면만을
확대하여 극사실기법으로 그려냈다.
이 부분은 원래 연주자들의 치마나 바지의 풍성한 실루엣에 파묻혀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부분이건만
화가는 유독 이 부분을 통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가야금은 주인과 더불어 한 세월을 보낸 그 자신, 산전수전을 겪은 예인이다.
하지만 어떤 곡을 연주했는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다.
그는 지금 주인과 더불어 보냈던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고요히 회상하고 있다.
낡았지만 여전히 멋들어진, 오동나무로 만든 머리의 조각들과
고태미가 흐르는 피부와 부들의 장식들은 주인의 따뜻한 아낌의 시각을 알알이 드러내면서
달빛 아래 보냈던 수없이 아름다운 순간들을 한 송이 장미로 대신해 하나하나 헤아려보고 있는 것이다.
긁고 또 긁는 집요함 나이프 워크가 드러내는 사물의 속살, 그리고 생생한 감동의 작가
김용선, <숲 - 속삭임>
작가의 원숙한 나이프질이 빛나는 또 다른 표현의 장르는 '어지러움'이다.
그 중에서도 운동성을 가진 어지러움의 표현에 이만한 것이 없다.
(중략)
백두산의 자작나무 숲은 유명하다.
화가는 여기에까지 와서 빽빽이 들어선 자작나무의 무성한 가지와 잎들이
차가운 겨울바람에 무섭게 울부짖는 소리를,
날카로운 나이프와 꼬챙이로 공간을 찌르고 헤집어 마침내 화폭에 담아내기에 이른다.
작가의 집요한 작업에 못 이겨 공간이 내지르는 비명은 고요하던 자작나무 숲을 뒤흔들어
아무도 못 말리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도록 만든다.
이 그림 앞에 서 있으면 어느새 몸부림치는 자작나무들이 내뿜는 피톤치트가 코를 찌르고,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상쾌함이 만져질 듯 생생하다.
김용선, <정물>
한 무리의 꽃을 그렸지만, 그림만으로는 무슨 꽃인지 알 수가 없다.
국화인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작약 같지만, 중요한 것은 꽃의 이름이 아니다.
작가가 정작 힘을 준 부분은 배경, 그중에서도 허공이니까.
꽃은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조연에 불과하다.
이번에 작가의 나이프가 긁은 것은 허공, 그 중에서도 공기의 본질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무엇으로 꽉 차 있고.
또한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공기의 본질이, 그것을 느끼고 그것과 교감하고 있는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닮은 한 무리의 꽃을 통하여 우리 앞에 생생히 드러나고 있다.
사라져가는 달동네 풍경 속에 가슴 뭉클한 감동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화단의 휴머니스트
김정호, <서울의 달-염원>
김정호, <서울의 달-그리운 기억으로>
김정호, <서울의 달-하월곡동>
대한민국 근, 현대미술의 살아있는 전설
고전과 초현실주의를 아우르는 폭넓은 작품세계를 가진 진정한 거장
김종하, <물고기를 인 여인>
1967년에 그려진 그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분위기가 느껴진다.
발표 당시부터 '물고기를 인 여인의 초상'이라는 설정 자체가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 할 파격도 파격이려니와
물고기의 크기나 머리에 얹힌 모습들이 생생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띠고 있었기에
한국화단에 굉장한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 화가의 나이가 올해 94세라고...)
억압과 상처, 자유와 치유를 섬세한 조형으로 풀어내는
김형주, <영혼의 바람>
작가의 작품들은 원래 여성적 특징을 바탕으로 한
억압과 치유를 상징하는 밴디지(붕대)를 형상화한 것으로 출발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밴디지의 조형미가 더욱 완숙해져서
최근 작품들에서는 그만의 독창적 조형언어로 살아 숨쉬고 있다.
반대로 밴디지의 상징적 측면은 작가 특유의 낙천성이 점차로 살아남으로써
초창기의 억압되고 답답한 모습에서 벗어나
내부로부터의 은밀한 희망의 메시지를 밖으로 당당하게 드러내면서
보다 적극적이고 활발한 표현의 시대로 돌입해 있다.
영혼의 바람:
작품은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의 측면두상이다.
여인의 머리카락이 왼쪽으로부터 머리 뒤를 타고 오른쪽으로 부드럽게 휘돌아 전방으로 뻗어 있다.
이는 들키지 않게 조심스럽게 그리고 간접적으로라고 하는 여성 특유의 바디 랭귀지와
내면을 관통하는 의식의 흐름을 조형적으로 표현한 빼어난 수법이다.
재미있는 것은 길게 뻗은 머리카락이 새의 날개형상으로 활짝 펼쳐져 있다는 점이다.
이문열의 소설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작품이 있다.
멋모르는 사람들이 흔히 "우리는 추락하는데 날개도 없냐?"는 둥
날개를 추락으로부터 구원하는 희망의 상징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사실은 모든 타락한 인생의 근원에 욕망(날개)이라는 씨앗이 있다는 뜻이다.
날개가 없었다면 날아오를 일이 없으니, 떨어질 일(추락) 자체가 애초에 없었을 것 아닌가?
이처럼 날개가 여인의 머리카락과 환상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관객들을 희망도 욕망도 아닌 예기치 못한 또 다른 상상의 세계로 몰아가게 되는 것이다.
알다시피 여인의 머리칼은 피부 못지않게 예민한 감각 수용체이다.
남자가 연인의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는 모습은 낯설지 않은 로맨틱한 풍경이 아닌가?
그러나 이 작품에서 여인의 머리카락은 이러한 수동적 감각의 수용체 이미지를 과감히 벗어나
능동적으로 허공을 향하여 마치 곤충의 더듬이같이 힘차게 뻗어 있다.
나아가 허공을 향해 활짝 펼친 손가락처럼 간절한 갈구의 표현마저 느껴진다.
그런데 이러한 이미지가 새의 날개와 결합하게 되면
바람을 적극적으로 움켜쥐고 희롱하며 힘차게 날아오르는 의미를 동시에 갖게 된다.
보라. 작품 속의 날개는 이미 바람을 의식할 뿐 아니라 그 바람을 타고 있지 않은가?
이제 관객들은 작품 주변에서 불어오는 부드러우면서도 신선한 바람마저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이 바람이야말로 보이지 않게 작품을 장식하고 있는 사실상 이 작품의 테마라고 할 수 있다.
한껏 부푼 날개를 꼿꼿이 세우고 바람을 희롱하고 있는 여인의 머리칼은
또한 바람의 애무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이 여인의 눈은 꼬옥 감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인은 지금 끝없이 자라고 있는 머리카락처럼,
그리고 한껏 펼쳐진 날개처럼 황홀한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고 있는 중이다.
한 발짝 더 나가보자.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이 아직 남아 있다.
여인의 얼굴을 포함한 두상과 머리카락이 이루고 있는 조형적 형태는
머리에서 날개 쪽으로 급한 S라인을 그리다가 이후 머리카락의 끝을 향해 비교적 완만한 선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으로 우리는 일종의 동적인 흐름,
정확하게는 속도감 넘치는 의식의 흐름을 눈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원래는 둥근 타원형 입체여야 할 여인의 머리는 좌우로 납작해져서
물고기의 몸통처럼 유선형으로 변해 있다.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시계와 같은 초현실적인 변화를 보노라면
변화의 불똥은 어느덧 관객의 의식으로 옮겨 붙게 된다.
유선형으로 변한 여인의 머리는 여인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헤엄쳐,
순식간에 머리칼과 날개로 변하고 이윽고 바람을 타고 허공 속으로 사라져
마침내 바람 그 자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온 그림과 조각 작품 가운데 가장 탐이 나는, 그야말로 욕심 물씬 땡기는 작품-
제목마저 근사하기도 하여라!
저 조각의 공간감이란, 상상만 해도~~~!)
김형주, <back of the wind>
이런 조형을 만들기 위해 작가는 실제로 두상을 조각하고 밴디징을 한 다음
필요한 부분만을 남기고 다 제거하는 힘든 작업과정을 고집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품의 생명력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
극사실주의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
화가의 묘사기법이 물론 중요하다.
사실에 가까울수록, 나아가 사진을 넘어선 느낌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이 분야에 있어서 기본이면서도 절대적인 기준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친다면 훌륭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는 못 된다.
극사실주의기법의 일차적 목적은 관객의 시선집중인데
이제 겨우 그것을 이룬 상태이기 때문이다.
자, 손님은 끌었는데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지금부터는 나의 내면으로부터 좋은 영화 한편을 보는 것과
똑같은 감정이 일어나는지를 살펴야 한다.
어려울 것 같지만 이 화제에 다가서고 천착하기까지의
화가의 주변환경과 그의 삶의 이력을 찬찬히 떠올려본다.
어, 그런데 참 그의 나이가 몇이더라? 결혼은 했나? 아이들은?
이렇게 순간적으로 그에게 다가설 수 있는 나의 삶과 공통점을
찾아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어찌 되었건 공감이 없는 작품을 구입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다음으로는 화가의 의식수준을 갈파해내야 한다.
사실은 이 부분이 그림의 품격을 결정짓는다.
그리고 이 행위야말로 온전히 컬렉터의 고유한 권한일 뿐 아니라,
잘하면 행운을 거머잡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그래서 뭘 보여주겠다는 거야?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려보라.
공허한 답이 돌아온다면?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돌아서는 거다.
다음의 인연을 기약하면서….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형상화하는 시간의 시인
문창배, <시간-이미지 2>
작가가 사는 제주 해변에 지천으로 깔린 현무암 자갈들이다.
돌멩이 하나하나의 질감과 명암, 선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완벽하다.
이런 그림이 나오기까지 작가의 수고를 생각하면 절로 숙연해진다.
작가가 아니라면 억만 년이 흐르는 지난 세월 동안 누가 있어
이 보잘 것 없는 자갈들의 역사와 존재감을 이렇듯 생생하게 남겨놓는단 말인가?
인간의 찬사를 즐기는 돌들의 마음이 이렇듯 절절하거늘!
앞으로 하잘것 없어 보이는 다른 것들에게도 화가의 의지가 골고루 미치기를 바랄 뿐이다.
문창배, <시간-이미지(나무)>
작가의 시간에 대한 또 다른 화두인 나무단 시리즈의 대표작이다.
사실 이 나뭇더미가 등장한 것은 2008년 후반기부터였지만
약 1년여의 실험 끝에 2009년 10월에서야 지금과 같은 완숙한 시간 이미지를 갖는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작품은 역시 작가 특유의 극사실기법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관객들은 실제의 나뭇단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 착각에서 정신을 차리게 해주는 장치가
바로 화면 중앙 약간 우 하단에 그려진 잘 깎은 연필 한 자루다.
지우개가 날린 노란 색 연필은 화면의 대각선상에 정확히 위치하면서
날카로운 끝을 반대편 꼭짓점을 향해 잔뜩 벼르고 있어서,
관객들은 비로소 시선의 안정을 취하고 일견 무질서해 보이는 나무더미들 속에
작가가 숨겨놓은 비밀스러운 코드들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된다.
연필의 역할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쌓인 나뭇단들은 원목이라기보다는
일견 땔감으로나 쓰여질 것처럼 작고 보잘것없어 보인다.
자세히 보면 이것들은 모두 방금 전까지 우리들 인간과 몸을 비벼가며 생활하던 것들이다.
못이 뽑혀진 자국이 선명한 각목들은 아마 문짝이나 벽체의 골재나 미장재로 쓰였을 것이다.
뿐인가?
백 년 가까이 한옥지붕의 서까래 노릇하면서
집안 인간들의 대소사 모든 사연들을 묵묵히 들으며
어느덧 자신도 인간인지 나무인지 정체성에 혼란을 겪던 터줏대감도 있고,
새 집에서 인테리어로 쓰였다가 졸지에 무허가로 집이 헐리는 바람에
황당한 신세가 된 놈들은 옆구리에 대패질 자국마저 선명하다.
도대체 무엇에 쓰려고 이 잡다한 것들을 이렇게 많이 쌓아둔 것일까?
깎은 연필은 이 물음에 대한 힌트다.
이것들은 모두 조만간 연필로 다시 태어날 운명의 잡목들이다.
갑자기 나무들 각자가 경험했던 인간사 온갖 시간들이 주마등같이 흘러간다.
많은 이야기들을 연필 하나로 이끌어내고 정리해 내는 작품기획도 참신하지만
작가의 탄탄한 묘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이런 감동까지는 결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실경을 현대적으로 묘사하는 신선한 느낌의 극사실적 수묵화
오종철, <초여름>
보석처럼 빛나는 마티에르와 소나무의 화가
이동업, <소나무>
마음에 드는 소나무를 찾아 현장에서 사진을 찍어오고,
스케치한 화면 위에 화성암의 주요 성분인 장석(長石)을 깐 뒤 건조시킨다.
여기에 다양한 색으로 점을 찍은 후 흑백으로 소나무를 그린다.
각 소나무의 느낌을 다르게 하는 것이 작가의 주안점이다.
이동업, <나목 a> <나목 b>
이동업, <구룡포>
1992년. 작가 나이 35세의 펄떡이는 젊음이 날 것으로 느껴지는 30호 비교적 대작이다.
관객들은 그림이 주는 속도감 때문에 대번에 눈이 아찔해질 것이다.
"그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유치환의 시 <깃발> 중에서)이라고 노래했던 청마의 그리움이 이제는 관객의 가슴속으로 옮겨 붙어
단숨에 빨려들듯 바람처럼 바다를 향해 치달린다.
이런 그림을 그리던 화가였다.
그새 작가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났던 것일까?
지금의 마티에르에 대한 영감이 시들면,
다시 이 가슴 벅찬 속도감의 세계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인가?
들꽃들의 클림트, 그의 꽃들은 기쁨에 넘쳐 있다
이석보, <소국>
이석보, <들꽃>
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버려진 수레 속에 핀 패랭이와 이름 모를 꽃들이여!
언제부턴가 전시장에서 다른 화가들의 들꽃 그림을 볼 때마다
화가의 이 작품을 떠올려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음을 고백한다.
소품과 주제가 이처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주제에 대한 사랑과 관찰의 심도가 이보다도 더 깊은가?
그리고 감동적으로 무르익은 이 필치와 색상과 비교하면 어떤가?
풍경의 마음을 읽고 숨은 움직임마저 화폭에 옮겨놓은 한국화의 귀재
이춘환, <자연의 소리>
가을비가 제법 굵은 빗줄기로 투두둑 떨어지는 늦가을의 을씨년스러운 날씨다.
시냇물은 이내 불어나 흐르는 물소리가 제법 귓전을 때리고,
불어오는 가을 바람 소리 나그네의 갈 길을 재촉하는데,
찬바람은 어느새 몸속으로 스멀스멀 기어 들어온다.
한 장의 그림으로 만들어낸 비 오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간결한 선 몇 개만으로 화가가 묘사한 자연은 이렇게 다이내믹하고 감각적인 풍경이다.
이춘환, <자연의 소리(靜)> 위
<산의 기운>
(미니멀 기법으로 표현한 무지개, 보이시나요?)
이춘환, <산의 기운-삼각산>
(앞의 '산의 기운'과 참 달라졌죠?
놀라운 화가의 세계^^)
조형적 재해석으로 서사적 풍경화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거장
이한우, <아름다운 우리 강산 2>
(이 책의 저자가 이 그림을 좋아하는 까닭은
숲이 우거진 뒷산을 배경으로 고즈넉하게 들어앉아 있는 집 안마당 풍경 때문이라는군요.)
이 화가의 그림은 모두 한국의 아름다운 산수 풍경들이다.
1927년 통영 출생이니 올해로 84세안 이 원로 화가는
그의 대표작 아름다운 우리 강산 시리즈로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너무도 유명한 인물이다.
한국과 프랑스에서 각각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과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문화기사훈장을 받은 국제적 인물이기도 하다.
산과 나무, 들판과 포구, 바다 풍경과 마을, 논밭, 마을, 집 그리고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일상들, 사실상 한폭의 캔버스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장대한 대상들이 묘하게 어울려 하나의 서사적인 풍경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모든 경치는 과감하게 생략되고 몇 가지 특징적인 선으로 정리되며
컬러 또한 통일성을 띤다.
그는 한국인의 정서를 구현한 정선의 <진경산수화>와 김홍도의 풍속화 전통을 바탕으로 조형적인 재해석을 통해
현대적 유화기법을 이용하여 완전히 새로운 화풍을 창조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대상의 내면을 드러내는 인상적이고 질박한 마티에르
장용길, <술 익는 창나루의 밤>
장용길, <포도>
동작만으로 표정을 만드는 조각의 마임, 21세기의 채플린
정국택, <Today, v-4>
오늘 하루라는 지목의 연작 시리즈 중 네번째 작품이다.
사실 이 화가의 작품들은 아주 많다.
좀전에 말했다시피 작품의 테마는 이미 우리 주변에 익숙한 샐러리맨들의 일상이나
소시민들의 그것인데다가작품의 조형 또한 복잡하거나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 특성도 있는 까닭이다.
이번에 해설할 작품의 테마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똑같은 매일매일 샐러리맨의 일상' 중에서 가져왔다.
조각이 우리가 알고 있는 다람쥐 쳇바퀴와 다른 점은 출구가 있다는 데 있다.
여기에서 출구란 다름 아닌 퇴근 시간을 말한다.
가방의 위치에 따라 인물의 동세가 달라지는 점도 재미있다.
퇴근 시간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의 신나는 발걸음을 보라!
출근 때와는 영판 다르지 않은가?
표정이 없는 인물의 몸짓으로 만들어낸 팬터마임이 오히려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정국택, <fly-10>
백천간두에 진일보라는 말이 있다.
문자 그대로 높은 솟대의 끝에 서서 한 걸음을 더 앞으로 내딛는다는 황당한 말이다.
그러면 추락하고 땅에 떨어져 죽을 일밖에 없다.
그러나 사실은 상식과는 조금, 아니 많은 차이가 있다.
더 이상 쫓길 수 없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에게 자신의 상식과 경험을 모두 잊어버리고,
오히려 갈 수 없는 길로 한걸음 더 나아갈 때,
의외로 상상치 못했던 결과를 불러일으킨다는 불가의 격언이다.
작품은 샐러리맨에게 진지하게 묻고 있다.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조직에 얽매인 삶을 벗어남으로써 생기는 두려움이
당신을 백천간두에 서도록 만든 것은 아닐까?
두려움을 벗는 유일한 길은 오히려 당당하게 맞서는 길일 것이다.
절망의 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라.
진정한 자유가 느껴질 것이다.
인물의 몸은 막 도약을 시작하여 허공에 걸려 있고
온몸에 힘을 자연스럽게 빼고 있다.
얼굴은 없지만 분위기로 만들어낸 표정은 정말로 밝고 자유로워 보인다.
허공과 인물 간에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이 탁 터지는 장쾌함이 일품이다.
세잔을 넘어선 색의 천재, 내면의 색채를 드러내다
진양욱, <숲과 마을>
이 화가는 보석같은 마법의 푸른 물감을 가지고 있다
최정길, <지중해>
최정길, <추억의 프라하>
두려움으로 드러내는 맑음과 고요의 세계
그리고 생명의 본질
추연근, <정(淨)>
깊은 산 속 바위 틈에 맑디맑은 초록의 옹달샘이 자리잡고 있다.
시간은 어스름함으로 아침인지 저녁인지 분간할 수 없다.
시간의 경계를 초월한 이곳은 작가의 마음속 풍경이다.
맑음을 표현하는 데 있어 탁함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소재며
탁함을 표현하는 데는 이 화가를 능가할 사람이 드물다.
역설적으로 가장 맑은 그림은 그래서 이 화가의 두터움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두터움이야말로 이 화가의 기법상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두터운 흰 색이 거칠게 덧칠된 면이
오히려 청정함을 드러내는 아이러니 앞에 관객들은 일순 넋을 잃는다.
그런 것이었던가?
삶의 비바람이란 절대로 점잖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또한 매끈한 매너로 대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뒤끝 또한 깔끔하지도 않다.
피카소를 넘어선 신입체파(Neocubism)의 세계적 거장
한미키, <꽃병과 사과가 있는 정물>
극사실로 그려낸 초현실적 세계
황제성, <순환의 바람-따스한 사랑 5>
시간을 알 수 없는 초현실적 배경은 여전하지만
그림 속에는 어떠한 반전도 없고 다만 오래된 에디슨의 축음기와
붉은 할미꽃이 대화를 나눈다.
축음기가 들려주는 음악이 어쩐지 닐 암스트롱의 색소폰 소리처럼 따뜻할 것 같지 않은가?
꽃과 솜털의 느낌 또한 따스하기 이를 데 없다.
화가의 현란한 기교에 인간의 감성이 깃들어 만들어낸 감동적인 장면이다.
'밑줄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생이 그림 같다 =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 (0) | 2011.04.09 |
|---|---|
| 후투티를 기다리며 (0) | 2011.04.04 |
|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0) | 2011.03.23 |
| 꽃피는 삶에 홀리다 (0) | 2011.03.23 |
|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0) | 2011.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