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는 삶에 홀리다>
손철주 / 생각의나무 / 2009
"문 닫아걸면 어디든 깊은 산이라……"
공자도 "말에 무늬가 없으면 멀리 가지 못한다"고 했다.
(문장에) 파란과 (말에) 무늬는 음식에서 간과 같다.
말은 간이 맞아야 남을 설득하고, 글은 간이 들어야 잘 읽힌다.
얼굴 하나를 그려도 정신이 닮아야 한다는 요구는 동양에서 유난하다.
"서시의 얼굴을 그렸는데 아름답기는 하나 즐거움이 없고,
맹분의 눈을 그렸는데 크기는 하나 두려움을 줄 수 없다면 무엇에 쓸까."
옛글에 나오는 말로 서시는 춘추시대의 미녀, 맹분은 전국시대의 용사다.
아름다운 여자든 씩씩한 남자든 그리된 연유가 얼굴에 씌어 있다는 주장이다.
조선시대 초상화야 말할 나위가 없다.
"터럭 하나까지 닮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고 할 만큼 사실에 임각했다.
국보로 지정된 송시열의 초상화와 윤두서의 자화상은 육박하는 실감에서 이를 따를 그림을 찾기 어렵다.
보는 이를 사로잡는 윤두서의 눈빛은 정신의 창이 틀림없고
송시열의 주름진 광대뼈는 거유巨儒의 간난신고를 적실하게 드러낸다.
백반증이나 흑달과 천연두 등 피부질환마저
고스란히 초상에 반영하는 조선 화가들의 속내는 기가 질릴 정도다.
이런 표현들이 노리는 바는 번연하다.
전신傳神이다.
정신의 흔적, 내면의 자취를 담으려는 화가들의 붓놀림은 얼굴색을 잡아내기 위해
종이 뒤에서 색채를 밀어올리는 '배채背彩기법'까지 창안해 냈다.
그들은 인간의 형용과 모색이 겉치레가 아니라
속차림이란 이치를 꿰뚫고 있었다.
우연은 인연을 맺기도 한다.
하지만 우연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다.
우연은 준비된 마음을 편든다.
(이산해: 선조대에 영의정을 두 번 지내며 강단 넘치게 살다간 16세기 문인이라고 한다.
그의 숙부는 <토정비결>로 잘 알려진 이지함이다.
이산해는 글씨와 그림에 모두 능했지만 전해지는 그림이 거의 없다.
조선시대 사군자 중에서 가장 숫자가 적은 게 국화 그림이다.
전문가들은 남아 있는 국화도 가운데 이산해의 작품을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는다.)
삶은 고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그것이 직방이다.
나는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 이데올로기가 무슨 쓸모인가"라고 말한 선생(이병주)의 편에 서고 싶었고,
허망이 뼈에 저릴 때 그 좌절조차 완미하려는 한 인간의 내성耐性에 홀려 있었다.
저자(오주석)는 옛 그림 감상자에게 딱 한 마디 말을 명심하라고 청한다.
"마음이 실리지 않으면 보되 보이는 것이 없고
듣되 들리는 것이 없다"는 것.
그는 "보고 들을 때는 옛사람의 눈과 귀를 빌리고,
느낄 때는 옛사람의 머리와 마음을 얻어라"고 독자에게 다짐받는다.
어떤 예술도 간과하는 자의 눈에는 무덤덤할 수밖에 없다.
참말이지 사랑해야 보게 된다.
서두르지 않아야 들어온다.
일상의 기물도 손때 묻은 세월이 길어지면 여상한 소재를 넘어선다.
그것에 추억이 쌓이고 사연이 덧붙는다.
그때의 문방구는 무심한 물상이 아니라,
남들 모르게 아낌을 받는 정인처럼 다가온다.
전혁림, <통영항>, 1989년, 개인 소장
화가 하인두는 전혁림 색의 살아 있는 촉감을 지적한다.
생전에 그는 전혁림의 그림에 대해 말하길 '비단 무늬의 피부를 펼치는 채색술'이라고 했다.
원색의 살결이 손끝에 만져진다는 이야기다.
전혁림 자신도 육성으로 고백했다.
"미술에서 색을 누락하면 무슨 재미인가.
색은 각기 고유한 자립성이 있는데, 색을 사용할 줄 모르는 민족은 멸망한다.
나는 그 색의 고유성을 존중하면서 조화를 추구한다.
나는 칠십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한국적 색채를 알아냈다."
전혁림은 고향인 통영을 굳건히 지키는 원로화가다.
한려수도의 물빛 정감을 가슴에 품고 산다.
어느 평론가는 그를 '해양성 체질을 체득한 화가'라고 했고,
'통영 앞바다에서 살면서 저 멀리 스칸디나비아나 지중해, 혹은 알래스카의 파도 소리와 교감한다'고 했다.
(중략)
오랫동안 중앙화단이 잊어서 그렇지 그는 그림을 잊은 적이 없다.
미술평론가 윤범모가 지적한 대로 그는 '철저한 무계보 무인맥의 자유인'이다.
서울과 절연한 채 향촌에서 전업화가로 살아온 그의 삶 전반기는 결핍과 적막이 지배했다.
그는 적막을 자청했다.
그는 말한다.
"중앙 화단과 단절된 지역에 살며 나는 오히려 내 작품의 독자성을 쌓을 수 있었다.
예술은 선생이 필요 없다.
자기 혼자 배우는 것이다."
정선, <조어>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옛 그림은 보는 그림이 아니라 읽는 그림이라고들 한다.
소재의 상징성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림의 마음씨를 읽어내는 일이다.
최북의 <풍설야귀인>을 보면 세찬 풍파에 시달려 늙고 지친 나그네가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애절한 마음씨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림의 마음씨는 어떻게 아는가.
감상자가 자기 마음을 그림에 실어서 볼 때 가능하다.
모든 일이 그렇듯, 마음이 실리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는 게 없다.
이 호랑이 그림은 남근주의나 마초의 기상을 뽐내기 위해 그려진 것일까.
우리 옛 그림은 보는 그림이라기보다 읽는 그림에 가깝다.
그러니 속내를 잘 짚어봐야 한다.
소나무와 호랑이에는 다른 뜻이 숨어 있다.
소나무는 장수와 정월의 상징이다.
매화와 동백, 수선 등 해가 바뀌는 것을 알리는 식물 가운데 으뜸이 소나무다.
음력으로 한 해의 첫 달을 뜻하는 정월은 '인월寅月'로도 불린다.
'인'은 물론 호랑이다.
소나무와 오랑이의 공통적인 상징이 바로 '새해'다.
새해를 맞은 사람에게 액막이하고 희망을 안겨주기 위해 그린 것이 이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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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준:
왕희지체에 속하는 단아한 필체를 구사했으며, 수많은 비석의 글씨를 후세에 남겼다.
충남 아산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비의 글씨를 썼고,
삼전도비석의 글씨도 썼다.
<근역서화징>에는 "오준이 글씨를 잘 쓰고 문장에도 능해서 삼전도비의 글씨를 썼으나
그로 인해 한을 품고 죽었다"라고 적혀 있다.
오준은 인조와 효종을 통틀어 최고의 명필이다.
병자호란 이후 한성부판윤과 예조판서를 지낸 그는 삼전도비문을 씀으로서 비운의 문사가 된다.
비문의 글을 지은 이경석과 글씨를 쓴 오준은
삼전도비 수립에 참여한 악연으로 평생 공박에 시달렸다.
여름날 과수원에서 금방 따온 듯한 검자줏빛 포도송이가 막사발에 담겨 있다.
황톳빛 막사발은 못생겨서 정겹다.
아가리는 이지러지고 굽은 뭉툭하다.
시골 인심처럼 무던한 그릇이다.
기우뚱한 막사발을 감싸고 있는 붉은색 배경은 손때 묻은 담장마냥 따사롭다.
자그마한 정물화에 불과하지만 사람 사는 동네의 푸근한 훈기가 감칠맛 나는 그림이다.
그림을 보면 화가의 심성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처럼 미덥고 사랑스러운 그림은 어떤 화가가 그렸을까.
<포도>를 그린 최재덕은 잊힌 화가다.
그러나 그는 잊힐 수 없는 화가였다.
경남 산청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일제 치하 도쿄에서 미술을 공부한 그는 이중섭의 단짝이었다.
해방 직후 이중섭과 함께 미도파백화점의 지하의 벽화를 그렸다.
최재덕이 제안해 이중섭은 복숭아나무에 아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벽화의 밑그림을 그렸다.
최재덕은 제1회 국전에서 추천작가로 꽃다운 이름을 떨쳤다.
그는 해방 정국의 혼란 속에서 좌파미술그룹에 가담했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월북했다.
이북 출신인 이중섭은 내려왔는데 이남 출신인 최재덕은 올라갔다.
이를 두고 그들과 친했던 화가 박고석은
"이중섭이 남으로 왔고, 최재덕이 북으로 갔으니 비겼다"고 했다.
최재덕의 위상을 알게 해주는 증언이다.
그는 그림을 억지로 꾸미지 않았다.
소박하고 천진한 그의 화면은 보는 사람을 미소 짓게 한다.
동심과 향수를 자아내는 그의 풍경화는 정감이 흐른다.
그를 잘 아는 화가 김병기는 "어수룩하면서 두툼한 그림이 피에르 보나르를 닮았다"고 회고한다.
보나르는 졸박하고 조촐한 색채와 형태로 작업한 프랑스 화가다.
최재덕은 문학인과 자주 어울렸다.
「목마와 숙녀」를 쓴 시인 박인환은 '마리서사'라는 책방을 운영했는데,
이 책방의 단골손님이 최재덕이었다.
시인으로 그림도 잘 그렸던 조병화는 그와 특별한 교분을 쌓았다.
이런 일화가 있다.
두 사람이 술을 마시고 한방에서 잠을 자다 최재덕이 한숨을 쉬었다.
조병화가 까닭을 묻자 최재덕은 돈이 한푼도 없다며 걱정했다.
이튿날 최재덕이 일어나보니 요 밑에 봉투가 있었다.
조병화가 봉투째 두고 간 월급이었다.
뒷날 화가는 시인에게 라일락을 그려주었다.
가난한 시절의 인정이 이토록 슬겁다.
최재덕의 그림은 많지 않다.
<포도>는 한 시절 시인 김광균이 소장한 작품이다.
시인들과 교유했고 시심이 넘치는 그였기에 시인은 그의 그림을 사랑했다.
그는 북한에서 체제 선전용 그림을 그렸다.
분단의 우울한 그림자는 그를 비켜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념이 인간의 속깊은 심성까지 빼앗으랴.
<포도>의 오른쪽 아래 서명을 보라.
'최재덕'이란 한글 석자를 교묘히 뜯어 붙여 황소 그림 하나를 그려놓았다.
그의 순박성이 이와 같다.
요즘 읽은 책(3권째)에서 계속 만나는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
밀레이의 이 그림은 흥미롭게도 실화다.
어느 여름날 윈첼시 인근 마을에 머물던 밀레이는 한적한 논밭 길에서 이 자매를 목격했다.
마침 폭풍이 몰아치고 간 그 길목에서 붉은색 치마와 검은색 치마를 입은 가여운 소녀들을 보자
그는 가슴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연민을 억누르지 못했다.
무지개 뜬 하늘을 결코 볼 수 없는 장님 소녀의 처지가 그의 맘을 흔든 것이다.
작품 <눈먼 소녀>에는 화가의 고조된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들뜬 흥분은 없다.
색채는 선명하고 화려하다.
하지만 사치스러움은 없다.
빨강, 검정, 노랑의 대조적인 색감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대신한다.
세부묘사 또한 치밀하다.
무릎에 놓인 손풍금, 논둑 위의 풀과 꽃
그리고 낡고 더러운 치마의 주름까지 세밀하게 신경 쓴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금을 울리는 것은 자매의 이심전심을 알려주는 장치다.
떨어질세라 힘껏 부여잡은 두 손에서 동기同氣간의 정이 사랑옵다.
그리고 하나 더,
언니의 어깨에 내려앉은 나비와 동생의 눈에 찬란하게 펼쳐진 무지개의 고운 선.
이것이 바로 자매의 운명을 따사롭게 이끌어주려는 화가 밀레이의 속 깊은 자비심이라 하겠다.
사석원, <닭>, 2004년, 개인 소장
"나무판에 캔버스 천을 씌워 그렸지요.
닭의 몸뚱이에 다 쓰고 남은 물감 튜브를 붙여봤어요.
물감 튜브는 산더미처럼 쌓입니다.
붓은 빨아서 다시 쓰지 않고 털이 뻣뻣해지도록 놔두기 때문에 금방 버리는 것이 많아지는데,
그런 걸 오브제처럼 이용해서 몇 작품을 만들었지요.
<자화상>이란 작품도 물감 튜브와 붓을 덧붙인 겁니다.
튜브는 건축용 자재로 쓰이는 핸디코트 위에 붙였어요.
거기에 물감을 드리핑해서 운동감을 주었습니다.
닭의 눈알은 물감 뚜껑이지요.
주변에 별들도 그려넣었으니 새벽닭이겠죠?
아침을 알리는 동물인데, 아직은 울지 않고 막 목청을 뽑으려 합니다."
사석원, <먼동>, 2004년, 개인 소장
<먼동>은 서정적인 공간감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날이 샐 무렵의 먼 동쪽 하늘이 떠오르는 듯 사석원은 동화를 읽는 목소리로 말한다.
"저 멀리 밤하늘에는 작은 별들이 총총하고 당나귀는 섬에 올라서서 장미꽃을 지고 있지요.
당나귀는 몸집이 작지만 고집이 세고 힘도 세서 척박한 곳에서 잘 삽니다.
그놈은 공연히 힘이 센 바람에 무거운 짐을 자초하는 것 같아요.
얼굴이 참 매력적이라 그리기 시작했는데,
내가 당나귀를 닮았다고 남들이 말하더군요.
내가 닮고 싶은 모습이 당나귀이기도 하죠.
저도 당나귀처럼 힘든 게 있습니다.
장손이라 남달리 꿋꿋함을 강요받기도 하고…….
꽃은 그런 당나귀에게 주는 아찔한 선물 아닐까요.
순간순간이 다 감동이라 느낄 때가 있는데,
화려한 장미꽃은 그때 가장 어울리는 선물입니다."
새벽하늘이라도 청천하늘이다.
하얀 별들이 무수히 찍힌 코발트블루의 하늘은 울트라마린의 바다와 몸을 섞는다.
장미 등짐을 진 당나귀는 근경에서 저 먼 하늘과 바다의 친애하는 교합을 지켜보고 있다.
당나귀는 세상이 안겨준 선물을 잔뜩 지고 있기에 하늘과 바다의 사랑놀음이 부럽지 않다.
장미는 화가 말마따나 열정의 선물이다.
그 뜨거운 정염을 농축시켜 붉은색을 만들고 아우성치는 사랑으로 낱낱의 꽃잎을 입 벌리게 한다.
사석원은 자축하고 싶을 때, 꽃을 그린다.
그는 잘 참아내는 자신에게 세상이 선물을 가끔 준다고 말하지만 이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자위한다.
세상보다 앞서 자신의 대견함을 치하하고 싶다.
그는 정말 잘 참아낸다.
남들이 하는 허튼소리에도 대꾸하지 않고 늘 태연하다.
십여 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한 화가가 그에게 '카드 같은 그림이나 그리는 놈'이라 퍼부은 적이 있었다.
미술동네에서 그 말은 '작가정신이 치열하지 못하다'라는 뜻이거나
'상업적인 작가'의 또 다른 표현으로 통한다.
사석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버선목이라 뒤집어보지 못했지만, 사석원의 속내를 알 것도 같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을 것이다.
'저 사람 카드 받아본 적이 없구먼.'
사석원은 카드나 선물이 얼마나 두근거리는 감동인지 안다.
그 감동을 남들 눈에 뻔히 내보이고 싶을 때, 그는 꽃그림을 양산한다.
사석원은 찰나의 황홀을 적시에 간파하는 눈이 있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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