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정독>
박제 / 아트북스 / 2007
고전예술에서는 지식을 통해 은유와 상징을 알아내고,
그 뜻을 새겨보면서 예술의 가치와 즐거움을 찾았다.
그럴수록 다 펼쳐놓아 한눈에 알아버리게 하는 밋밋함보다,
작가가 던져놓은 실마리를 감상자들이 찾아내도록 만들어두었다.
그 실을 따라오면서 작가의 뜻과 나타내고자 한 내용을 하나씩 알아내도록 이끈 셈이다.
브뤼헐의 작품에는 이렇게 묻어 놓은 이야기의 실마리들이 잔뜩 널려 있다.
그의 작품을 감상할 때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으려면
플랑드르 지방의 우화와 속담, 시대적 배경, 그리고 성경이야기 들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단박에 만나지는 껍데기 내용이나 느낌에 그치고 만다.
브뤼헐은 상징과 함축에 뛰어나기에,
그의 작품은 바깥으로 드러난 단순한 이차원의 평판에 그치지 않는다.
들어갈수록 넓게 펼쳐진 내적 공간을 품고 있다.
높은 감상 능력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숨어 있는 내용을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 더 큰 매력이었다.
수수께끼를 푸는 지적 즐거움을 맛보면서 점점 깊은 속뜻으로 빠져들기를 좋아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케케묵은 방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천재성이다.
브뤼헐은 그것을 마음껏 펼쳐 보인 화가였다.
때로 생각의 방향을 조금만 바꾸면, 미처 깨닫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그림은 길게 설명하는 예술이 아니다.
위대한 예술가는 이미 있던 것을 따르는 게 아니라,
그것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사람이다.
모든 문화와 예술은 모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얼마나 외부의 것들을 스스로 잘 삭히고,
자기 것을 재창조하는가에 그 판가름의 기준이 설 것이다.
판 데르 베이던의 작품세계에 나타난 이런 극도의 감정 표현들은
여느 다른 예술가의 작품보다 더 감동적이다.
보는 이의 가슴에 인간의 극적인 상황을 너무나 고스란히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직접 대하면 머리카락이 꼿꼿하게 서는 듯하다.
어느새 눈시울이 달아오르는 것을 참기 힘들 정도이다.
어떤 의미에서 예술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가슴을 뒤흔드는 이런 감동을 받기 위해서이다.
감동이 예술의 전부가 아닐지라도, 한 작품을 마주했을 때
작품이 먼저 보는 이의 가슴을 열지 못한다면
그 내용을 받아들이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만드는 모든 예술의 바탕은 한결같다.
이런 예술의 세계에 다가가고,
더 나아가 그 속에 빠질 수 있는 첫걸음은
바로 등골을 훑고 지나가는 강렬한 감동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눈물을 짜내려고 만든 설익은 꾸밈새나
억지스런 몸짓으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안으로 참됨이 가득 담겨 있을 때
누구나 구것을 느낄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상태를
눈에 들어올 수 있는 어떤 모양으로 그려낸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하나의 진정한 예술작품이 만들어지려면 정성을 다한 노력과 창조적인 천재성,
그리고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이 있어야 한다.
이런 바탕을 지닌 작품들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돋보여 변함없는 생명력으로 깊은 감동을 준다.
판 데르 베이던의 작품들을 대하면 6백년에 가까운 시간의 틈을 넘어서
지금도 가슴 떨리게 하는 어떤 힘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예술가와 그의 작품은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예술가는 그가 표현한 작품 그 자체이고,
예술작품은 그것을 만든 예술가의 분신인 것이다.
그림이라는 것은 단순히 물감만 여기저기 찍어 발라 놓은 평면이 아니다.
그 속에는 그것을 만든 사람의 정신과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과
표현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바깥에 드러난 모양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아울러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이나 느낌을 찾아내고 전달받았을 때,
비로소 그림 감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려면 두말할 것 없이 그림이란 예술을 좋아해야 한다.
거기에다,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것이 있다.
하나의 작품 앞에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는 것, 마음의 눈을 뜨고 보는 것이다.
넉넉한 시간이라는 것은 십 분이니 한 시간이니 하는, 정해진 기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작품과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 사이에서 어떤 흐름이 시작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을 가져야 함을 이르는 말이다.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자기 의사를 표시하는 사람들끼리도 서로를 알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하물며 아무 말 없이 걸려 있는 그림과 그것을 보는 사람 사이에서 뭔가가 통하려면
적어도 어느 정도 시간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우리와 함께 살아 잇는 작품들은 위대한 천재들의 작품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따라가지 못할 재능을 가진 그들조차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평생을 갈고닦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단단한 결정체를 그냥 스쳐지나가면서 이하하거나 느낀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
흔히들 예술작품은 보아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들 한다.
눈도장을 찍는 짧은 시간 만에 '보았다'라고 하지만, 이것은 '보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 감상은 '느끼고 즐기는' 것이지, '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시간적 여유와 마음의 준비가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의 작품을 느끼기 시작할 수 있다.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은 건성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을 말한다.
두 눈에 그치지 않고 마음이 가 닿아야 그림 속에 들어 있는 내용들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독 마음이 끌리는 상대가 있듯이,
왠지 모르지만 마음을 끄는 그림들이 있다.
이런 그림들은 보는 이의 관심과 좋아하는 마음을 붙잡은 것이다.
다시 말해, 감상자의 마음에 맞는 그림이다.
이럴 때는 그림도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 보여주게 되고,
보는 이도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좋다고들 해도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림도 있다.
자신의 쏠림에 맞지 않든지, 그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준비를 아직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시간이 지나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를 바라면서 그냥 떠나도 괜찮을 것이다.
흐르는 시간을 따라 사람의 마음도 바뀌고, 좀더 넓고 깊게 작품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면
자연스레 서로가 이어지게 될 때가 오기 마련이다.
볼수록 잔물결이 멀리까지 퍼져나가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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