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친 이야기

'세상의 상처' 알리는 메신저가 된다면...

keepthesunshine 2011. 8. 13. 11:12

 

프로메테우스, 방자, 바리데기, 천사, 헤르메스의 공통점은? 바로 위대한 인연의 메신저라는 점이다. 인간과 불을 매개해준 프로메테우스, 춘향과 몽룡의 불가능한 인연을 성사시켜준 방자, 하느님의 메시지를 인간에게 전해주는 천사들, 제우스의 온갖 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이어주는 헤르메스. 태어나자마자 자신을 버린 아버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준 후, 드높은 벼슬자리나 일확천금도 마다하고 황천길을 방황하는 죽은 자들의 길잡이를 자처한 바리데기까지.

 

이렇게 메신저 업계의 유명인사들도 많지만, 우리 곁에는 천사처럼 어여쁜 일울 몰래 해놓고도 흔적 없이 사라지는 매개자들이 있다. 그 일이 성사되기 위해 그 사람이 꼭 필요하지만, 정작 그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주어'나 '동사'같은 중요한 품사가 아니라 '조사'나 '전치사'처럼 그 존재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이 인정받거나 유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어떤 일이 성사되도록 하기 위해 고군분투해본 사람들은 뼈저리게 이해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중요한 주어나 동사가 되는 것보다 누구나 쉽게 스쳐지나가버리는 조사나 전치사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세르는 <천사들의 전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타나기 위한 사라짐, 사라짐을 위한 나타남이 메신저의 존재방식이자 소멸방식이라고. 존재의 윤리는 재능이나 권위가 아닌 아름다운 소멸을 통해 드러난다.

 

블로그나 미니홈피를 비롯한 각종 '1인 미디어'들로 인해 현대인들은 누구나 메신저가 될 수 있는 기술적 자원을 확보했다. 하지만 우리 곁에는 보이지 않는 천사들보다 '지나치게 눈에 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메신저'들이 판을 치고 있다.

 

첫째, 메신저가 메시지를 가로채는 경우다. 수많은 메시지들이 '이윤'만을 챙기는 잘못된 메신저들로 인해 왜곡되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둘째, 메신저가 메시지 자체보다 중요하거나 대단해 보이는, 가치의 전도 현상이다.   이것은 메시지를 전달받는 사람들도 빠지기 쉬운 오류다. '그 소식' 자체보다 그 소식을 '누가' 말했는지, '어떤 매체'가 말했는지를 신경쓰는 순간, 우리는 메시지의 내용보다 메신저의 권위를 따지는 실수를 범한다. 셋째, 메시지보다 메신저의 외적 요소들이 오히려 화제가 되는, '엉뚱한 방점'의 오류다. 예를 들면 아나운서의 뉴스 전달 실력보다 미모나 학벌 같은 외적 요소들이 오히려 화제가 될 때. 모두가 이용할 권리가 있는 중요한 정보에 각종 '통행세' 지불을 요구하는 거대 매체들의 횡포 또한 '좋은 메신저'와는 거리가 먼 행태들이다.

 

미셸 세르는 메신저가 빠지기 쉬운 윤리적 함정을 이렇게 지적한다. 메신저가 남의 환심을 사면, 전달은 가로막혀." "운반자의 으뜸가는 의무는 이울기, 옆으로 비켜서기, 날기, 물러남이야." "가장 나쁜 천사들은 눈에 보이고, 가장 좋은 천사들은 사라지는구나." 그렇게 메신저는 '존재'보다 '관계'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좋은 메신저는 단지 전달만 하는 자가 아니라 메시지를 새롭게 창조하는 존재다. 흔히 말하는 '통섭'이랴말로 그냥 내버려두면 화석처럼 굳어질 지식을 새롭게 콜라주하여 모두를 위한 지식으로 창조해내는 메신저의 즐거운 의무다. 메신저는 정형화되지 않은 지식, 아직 타인의 입김에 노출되지 않은 미결정된 지식에 살아있는 육체의 형태를 부여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분류와 분석으로 응고되고 화석화된 박물관 속 지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육체를 지닌 개개인의 삶을 치유하는 지식을 창조하는 사람이 이 시대의 진정한 메신저, 새로운 헤르메스가 아닐까.

 

메신저의 최고봉은 엳시 메시지를 '전달'하는 존재를 넘어 스스로 메시지 자체가 되는 경지다. 무심코 텔레비전 체널 돌리기 놀이를 하던 중, 뜻밖의 장면에 눈시울이 뜨거워진 적이 있다. 지난 30여년간, 저 험준한 설악산을 매일 수십 번씩 오르내리며,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길에 각종 음료수, 식재료, 엘피지가스, 132kg에 이르는 대형냉장고까지 운반하신 지게꾼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우리가 설악산에서 마셨던 그 청량한 사이다, 그 상큼한 청포묵, 그 아삭아삭한 산채비빔밥은 그분의 무거운 지게 끝에서 피어오른 아름다운 꽃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살아있는 시시포스, 살아있는 헤르메스가 바로 우리 곁에 있었다. 그는 그렇게 묵묵히 세상을 들어올리고 매일매일 세상 밑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모두가 대단한 헤라클레스나 위대한 프로메테우스가 될 수는 없지만, 사랑스러운 큐피드나 유쾌한 헤르메스가 될 수 있는 길은 도처에 널려 있다. 우리가 조금만 타인의 신음소리에 귀 기울인다면. 우리가 조금만 '나의 상처'가 아닌 '세상의 상처'에 눈돌릴 여유가 있다면.

 

(정여울, 문학평론가 / 한겨레신문 2011년 8월 13일자)                          

'밑줄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심야책방  (0) 2012.02.14
생각의 일요일들  (0) 2011.08.29
그림 같은 세상  (0) 2011.05.10
그림정독(인간을 보는 여섯 개의 눈)  (0) 2011.05.03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0) 2011.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