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근/ 이매진/ 2009
진짜 책들은 헌책방에 있다. 헌책방에 있는 책들은 거기에 그냥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의 책장에서 이사할 때 버려지고 유학 갈 때 정리돼 고물상이나 쓰레기장으로 들어간다. 그곳을 들추고 파내어 책을 찾는 사람이 있다. 그 책을 깨끗이 닦고 다듬어 다시 서가에 넣어 두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은 말 그대로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는 사람들이다. 헌책방에 있는 책들은 그렇게 복잡하고 위험한 모험을 거친, 거기서 살아남은 강인한 책들이다. 책은 보고, 읽고, 느끼는 것이다. 책은 그것을 만나는 사람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수도 있는 무한한 힘을 지닌 생명체다. 이 책들을 눅눅한 습기가 들어찬 창고 안에 처박아 두어선 안 된다. 사과 박스에 담거나 나일론 끈으로 꽁꽁 묶어 두어도 안 된다. 책이 세상 밖으로 나와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숨 쉬게 해야 한다. 갇혀 있던 책이 먼지를 털고, 누렇게 탈색된 책날개를 펼치고 덩실덩실 춤추게 해야 한다. 책을 사고 팔아 돈 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처음 가지던 그 마음그대로 책 앞에 겸손해야 한다. 그래, 그러면 이 이상한 나라에서 이상한 헌책방을 한번 만들어 보자. 책과 사람이 함께 어울려 숨 쉬고 노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보자. 책방을 만들기로 생각한 순간부터 한 가지 다짐한 게 있다. '내가 읽은 책 중에서 남들에게 권할 만한 책을 팔자'가 그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과일 가게 주인은 자기가 파는 과일에 대해 책임이 있다. 손님에게 신선하고 맛 좋은 과일을 팔아야 한다. 트럭에 채소를 싣고 다니면서 파는 채소 장수도 자기가 파는 채소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다. 과자를 파는 사람은 과자에 대해서, 물을 파는 사람은 물에 대해서, 옷을 파는 사람은 옷에 대해서, 자동차를 파는 사람은 자동차에 대해서, 남에게 돈을 받고 무엇을 파는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말 없는 책이지만 나는 수많은 책에게 책임을 느끼고 매일 사랑스런 눈빛을 보낸다. 이 책은 내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다른 사람의 것이기 때문에 나는 더 깊은 사랑을 느낀다. 기도하듯이 매일 아침 이런 생각을 하며 이상북 문을 연다. 책방의 기능은 책을 팔고 돈을 받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에게 좋은 책을 권하고 좋은 책들이 더 많은 독자들 손에 들어가도록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 글이라는 건 글자 하나하나를 나열해서 의미있는 문장을 만드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다른 사람에게 반드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심지어 써 놓은 글을 보고 '이거 참 쓸모없는 글이네'라는 마음을 갖게 됐더라도 그것 자체가 바로 그 사람에게 작은 영향을 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시 한 편을 읽고 인생 가치관이 변하기도 한다. 그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억 가지 일 중에 몇 안 되는 기적적인 일이다. 글은 그냥 활자일 뿐이며, 언어를 눈에 보이는 무엇으로 표시하는 기호에 다름 아니다. 그런 글자가 모여서 할 수 있는 일은 무한하다. 대단한 힘을 가진다. 때로는 한 개인에게 집채만 한 파도처럼, 커다란 산처럼, 원자폭탄처럼 강렬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오덕 님 말씀대로 글이란 자기 생각과 느낌을 정직하게 쓰는 것이 당연한 기본이지만,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치를 부여하고 함께 읽을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글 쓰는 사람 스스로 가치있는 사람을 살아야 하고 가치 있는 생각을 해야 한다. 만약 글쓰기가 어렵다면 바로 그런 삶과 생각이 어렵다는 말이 된다. 사람이 자기가 쓴 글처럼 산다는 게 더 힘든 일이다. 글처럼 살고, 사는 것 그대로 정직하게 글을 쓰는 사람은 영혼이 맑은 사람이다. 그 영혼이 수정처럼 투명하고 맑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안에 들어 있는 걸 다 볼 수 있다. 자기 전부가 투명한 사람은 겸손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다. 누구든지 그 안에 있는 모든 걸 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은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책 내용이 재미있어서 끌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책이 말하고 있는 사연 때문에 책을 좋아하게 된다. 오랫동안 사랑받는 책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책이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 동네서점이 없어지는 것- 동네에 있는 작은 책방이 하나둘 없어지고 있다. 며칠 전 어머니가 계신 수서동에 갔는데, 동네에 책방이 하나도 없어서 당황했다. 수서는 시골 동네도 아니고 주위에 학교가 여럿 있는데도 책방이 없었다. 요즘 동네 책방들이 계속 사라지는 추세이기는 해도 학교 근처에는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없다. 전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서 지하철역 지하에 책방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없어졌다. 크지는 않아도 그나마 이 근처에 우일하게 남은 거였는데. 이 동네에서 '책방'이라고 불리는 보호종이 결국 멸종한 것이다. 그날 나는 버스를 타고 잠실역 지하에 있는 교보문고까지 가서 책을 사야 했다. 1990년대 이후 대형 서점과 온라인 서점이 활기를 띠면서 동네에 있는 작은 책방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작은 책방에는 모든 책을 다 둘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책방에서 자기가 원하는 책을 찾는 경우가 많지 않다. 책방에 주문을 하면 하루나 이틀이 지난 다음 책을 받을 수 있지만, 요즘처럼 무엇이든 빨리빨리 해야 하는 세상에서 기다림은 고객무시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요즘은 온라인 서점에 주문하면 그날 오후나 저녁에 받기도 한다. 물류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주 고되지만, 책을 사는 사람은 정말 편하고 좋다. 이렇다 보니 동네 서점에 가서 책을 산다는 건 좀 무모하고 바보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대형 서점에는 별별 책이 다 있고, 언제 가더라도 원하는 책을 바로 사올 수 있다. 이미 절판된 책이 아니라면 대형 서점에서 찾을 수 없는 책은 없다고 해도 심한 말이 아닐 것이다. 동네 서점은 규모나 속도에서 완전히 뒤떨어졌고, 곧 모두 없어질 거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한때 유행이던 비디오 대여점이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는 것처럼 동 네 서점도 그렇게 될 거라는 얘기다. 하지만 나는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비디오테이프와 책은 다르잖아!" 우리는 언젠가부터 책을 물건처럼 사고파는 데 익숙해졌다. 물론 책은 어쨌든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이기도 하다. 책을 써서, 만들어서, 쌓아두고서, 영업해서 돈 버는 사람이 많다. 그것만으로 책을 공산품처럼 생각하는 건 아주 슬픈 일이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에서 '책'말고 다른 단어를 넣으면 어색하거나 우스운 말이 된다. 책은 바로 그런 것이고 책은 사고파는 건 그래서 아주 고귀한 일이라고 믿는다. 동네 서점에서 책을 사는 건 물건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고, 그 사이에서 귀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서로 오고가는 일이다. 나는 지금도 우리 동네에 있는, 아직 남아 있는 서점들을 돌아다니면서 우리가 함께 무엇을 해볼 수 있는 게 없을까 궁리하고 있다. 서점에서 사람과 사람이, 사람이 책을, 책이 사람을 만나게 하고 사람들 사이에 있다가 어느샌가 끊어졌던 가느다란 끈을 찾아 잇고 싶다.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한다. -헌책방은 아름답지 않다- 헌책방이 많이 사라졌다.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1970년대부터 1990년 이전까지 크게 성장하던 헌책방들의 전성기는 지나간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하더라도 청계천 헌책방 거리는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로 책을 사고팔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인천은 어떻고 부산은 또 어떤가? 부산 국제시장과 붙어 있는 보수동과 인천 배다리도 '헌책방 거리'라고 할 수 있지만 한창 때에 견주면 그 모습이 많이 초라해진 게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면 또 누군가는 '발끈' 할 지 모르겠다. 아마 그럴 것이다. 헌책방을 여전히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이 줄기는 했지만 아직은 제법 많이 있다. 고마운 사람들이다. 헌책방을 돌아다니면서 책과 만나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새 책을 파는 서점과 헌책방은 완전히 다르다. 책은 같은 책이되 방금 공장에서 나온 책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지금 내 앞에 나타난 책은 같을 수 없다. 헌책방에서 만나는 책이야말로 진짜 인연이라고 할 만하다. 헌책방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늘이 맺어주는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나도 몇 년 전부터 헌책(사실 나는 '헌' 책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루는 일을 하고 있다. 서울에서 가장 크고 사람도 많이 사는 동네 은평구, 그중에서도 음암동 어느 골목길에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라는 가게를 꾸려 일하고 있다. 돈은 많이 못 벌지만 이제는 조금씩 알려져서 단골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도 조금 생겼다. 책방은 돈벌이 장소이며, 동시에 책 읽고 글 쓰는 장소를 제공하는 곳이다. 나는 이 작고 아름다운 공간을 사랑한다. 이제는 진짜 현실을 이야기해보자. 이곳에 책을 사러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가 하면, 오로지 책을 싸게 사는 게 목적인 경우도 있다. 헌책방은 당연히 책을 싸게 파는 곳인데, 사람들은 그것보다 더 싸게 사고 싶어한다. 중고 책은 당연히 값이 싸야 하고, 심지어는 폐지 정도 가격에 사려는 사람들도 꽤 있다. 참 곤란한 일이다. 예를 들어 어떤 손님은 1977년에 초판이 나온 고은 시인의 <입산入山>이 헌책방에서 1만 원에 거래되는 걸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시집의 정가는 1000원이다. 손님은 정가가 1000원이면 무조건 1000원보다 싸게 팔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손님들에게 야단을 맞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헌책방을 운영하는 사람 치고 어려 보여서 그런지 몰라도 나이가 좀 많은 분들은 가끔 험한 말도 한다. 1000원짜리 책을 어떻게 1만 원에 팔 수 있냐고. 사기꾼이라고 . 그런가 하면 어차피 쓰레기 주워 책방에 갖다놓고 팔면서 책값이 왜 이렇게 비싸냐고 타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 말에 따르면 헌책방에 있는 책들은 모두 고물상에 버려지는 것들이다. 책방은 그걸 수거해서 파는 걸로 알고 있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책방에서 레닌이나 마르크스의 책을 파는 걸 보고 "빨갱이 책!"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책방에서 불온서적을 파는 걸 보니 사상이 불순하단다. 더 나아가서 책방에서 이런 책이나 파니까 나라가 이 모양이란다. 일일이 대꾸하다가는 말싸움이 될 게 뻔하니까 대부분 그냥 흘려듣고 있는 편인데, 어떤 사람은 한두 시간씩 국가와 민족, 애국에 관해 연설 비슷한 너스레를 풀어놓다가 돌아가는 경우도 있어 이것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좀 특별한 경우이기도 하지만 대단히 난처한 상황이 있다. 바로 책에 관해 아는 척을 하기 위해 오는 손님이다. 어러 가지 유형이 있지만 대부분 자기가 어디 대학교수인데 퇴직을 했다, 또는 오랫동안 공무원 생활을 해서 아는 게 많다고 직접 얘기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손님이 책방에 오면 진짜 난처하다. 자기 자랑을 시작하면 끝도 없이 계속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기 말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비하한다. 같은 책을 읽었어도 자기와 견해가 다르면 화를 낸다. 상대방이 책을 잘못 읽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손님을 대하면 우습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때로는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적어도 헌책방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시절에는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청계천 헌책방을 쓰레기장처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일꾼들을 얕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1980년대 헌책방들은 그랬다. 그때는 헌책방이 문화를 보관하고 재창조하는 공간이었으며, 대학가에서는 학생들이 안식을 얻는 곳이었다. 헌책방이 점점 사라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하지만 헌책방이 완전히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책방이 다시 한 번 빈곤한 문화를 채우고 사람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한다. 책방을 꾸려가는 일꾼이 특히 노력해야 하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함께 마음을 모은다면 중고 책에 관한 인식도 많이 바뀔 것이고, 중고 책을 파는 가게에 관한 생각도 자연스레 바뀔 것이다. 중고 책은 낡고 헐고 버려진 책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있을 때 늘 새로운 책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 책이 몇 명을 거쳐서 나한테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책은 늙지 않고 죽지도 않으며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으니까. 언제 만나더라도 갓 태어난 아이이며, 청춘이고, 사랑하는 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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