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친 이야기

엄마꽃

keepthesunshine 2010. 12. 2. 03:30

 

 

 

 

엄마가 남긴 오이지 --- 김정란(시인)

 

가장 단순한 단계에서 삶은 밥이다.

밥은 그래서 신성함의 의미마저 가지고 있다.

신성함은 가장 비참한 상태로 쪼그라든  생이 그 비참함 안에서 스스로 피워 내는 빛이다.

예수는 왜 초라한 식사를 생의 마지막 행서로 택했을까?

지극한 신성함은 생의 가장 근원적 요건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내 엄마도 그러셨던 걸까.

암 투병 중이던 엄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엄마는 이미 숨을 거두신 뒤였다.

엄마를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곁에 모시고 친정집에 왔을 때, 그제야 동생이 깜박 잊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참, 언니, 엄마가 언니 주라고 오이지 무쳐 두셨는데……."

병원에 입원하시기 전에, 어쩌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아신 상태에서, 그때까지도 딸을 거두어 먹이시겠다고…….

아, 엄마, 내 엄마.

어려서부터 나는 몸이 유난히 약하고 입이 짧았다.

잘 먹는 것이라고는 오직 여름에는 오이지, 겨울에는 김치뿐이었다.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우리 엄마가 무친 오이지 같은 오이지는 없다.

나는 그 오이지 맛을 지금도 내지 못한다.

오이를 고르는 단계부터 소금의 양, 물의 양, 눌러 두는 돌까지 모든 것이 다 다르겠지.

게다가 무칠 때, 물기를 짜는 손아귀의 힘, 그리고 오이지에 넣는 양념의 양도.

그것뿐이겠는가, 이 세상에서 엄마의 오이지를 가장 맛있게 먹는 당신의 딸이 없었다면,

그래서 딸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당신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아니었다면, 엄마의 오이지는 절대로 그런 맛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가 무슨 보물이라도 되듯이 비닐봉지에 꼬질꼬질 싸 둔 오이지 옆에는 당신이 몸소 기르신 청양 고추도 잇었다.

나는 집에 와서 혼자 그 오이지랑 고추를 다 먹었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 그 아픈 몸으로 딸에게 먹이겠다고 오이지를 무치신 내 엄마.

나는 그 오이지를 혼자 먹어야 했다.

그건 남편과도 아들과도 상관없는 나와 엄마의 배타적인 신성한 소통에 관한 문제였다.

고추는 정말 매웠다.

하지만 나는 엉엉 울면서 악착같이 다 먹었다.

대지에서 솟아올라 엄마의 손을 지나 내 몸속으로 들어가는 어떤 영기(靈氣) 같은 것이 느껴졌다.

신성한, 가장 단순한…….

그러나 오이지는 그 자체로 얼마나 절박한 사랑이기도 한가.

사랑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국수로 만들어진 사람 --- 김서령(칼럼니스트)

 

안반과 홍두깨는 한 시절 집집마다 생필품이었다.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홍두깨질을 할 줄 알아야 했다.

식구 많은 집은 홍두깨가 길고, 단출한 집은 짧았다.

안동 지방은 국수에 콩가루를 듬뿍 섞는다.

그래서 뭉쳐 놓은 반죽이 노리끼리했다.

그 반죽을 얼마나 얇게 미느냐가솜씨의 관건이었다.

국수발은 가늘고 길수록 고급품이었다.

얇게 밀지 않으면 가늘게 썰 수가 없고 국수장이 찢어지면 발이 길 수가 없다.

얇되 찢어지지 않게 탄력을 유지할 줄 알아야 좋은 숙수(熟手)라 할 만 했다.

다음은 썰 차례.

종잇장 같은 반죽을 차곡차곡 접은 뒤 칼로 썬다.

이때 칼땀이 일정하고 촘촘해야 한다.

계산으로 될 일이 아니고 호흡을 칼에 맡길 줄 알아야 한다.

사락사락 싸락눈이 내리듯 고요하게, 숨죽인 국수 올이 엄마 오른손 곁으로 쌓여 간다.

나는 선망에 가득 차서 엄마의 칼질을 지켜본다.

실은 아까부터  부엌에선 물이 끓고 있었다.

아궁이 앞이 불길로 환하고 간간히 탁탁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렸다.

갓 썬 국수를 채반에 펼쳐 든 엄마가 바삐 부엌으로 달려가고

나는 얼른 부엌과 안방을 잇는 자그만 쪽문 앞에 매달린다.

열린 솥뚜껑에서  솟은 김으로 부엌 안은 온통 희뿌옇다.

아궁이에서 비쳐 나온 불길이 엄마 얼굴 위로 붉게 너울거린다.

벌써 밤이 오나 보다.

내다보이는 하늘 위로 깜빡깜빡 샛별이 돋는다.

샛별의 깜빡임을 올려다보는 내 눈도 깜빡깜빡한다.

"엄~마." 부르면서 칭얼대다가 나는 헝겊인형처럼 쪽문 앞에 허물어져 버린다.

한참 후 엄마가 나를 흔든다.

"국수 먹고 자자. 얼른! 그래야 키가 크지."

상 위에는 세 종류의 국수가 놓였다.

아버지 건 찬물에 재빨리 헹궈 내 파랗게 애호박 고명을 얹은 건진국수!

엄마 건 뜨거운 국물과 함께 마구 푼 물국수!

내 건 국수 올을 건져내 깨소금에 무친 깨소금국수!

나는 눈을 뜨지도 않고

그 "부드럽고 소박하고 수수하고 슴슴하고 조용하고 의젓하고 고담(枯淡)하고 살뜰한 것." (백석의 시, <국수> 중에서)을 씹는다.

그리고 삼킨다.

국수는 그래서 내 키가 되고 살이 되고 기어이 내 맘이 되었다.

누군가 나를 가만히 들여다본다면 실은 내가 국수로 만들어진 사람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엄마는 글을 모르셨다 --- 조정육(동양미술평론가)

 

책장 서랍을 정리하다 엄마의 여권을 발견했다.

1996년 3월에 발급된 1년짜리 단기 여권이었다.

5년이나 10년도 아니고 1년짜리 여권도 있나, 싶어 넘겨 보니 한 군데에 도장이 찍혔다.

1996년 4월 18일 호주에 도착했다는 도장과 1996년 4월 21일에 호주를 떠난다는 도장.

대한민국 입국도장이 22일인 것으로 봐서 3박 5일 동안의 호주 여행을 위해 이 여권을 만드신 거였다.

도장이 찍힌 옆쪽에는 엄마의 혈압과 맥박 수가 적힌 빛바랜 종이가 붙었다.

앞뒤 장을 뒤적였지만 더 이상 엄마의 마지막 해외여행을 확인할 만한 흔적은 없었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엄마의 해외여행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다시 맨 앞장을 펼쳤다,

사진 속의 엄마는 일흔두 살의 할머니답게 짧은 머리에 녹색 스카프를 두르고 체크무늬 잡바를 입고 계셨다.

외출하실 때면 언제나 첫 번째로 손이 가던 엄마의 잠바.

멀리서도 엄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눈에 익은 체크무늬 잠바는 곧 엄마였다.

엄마 사진 옆에는, 엄마가 평생 한 번도 그 의미를 해독할 수 없었던 낯선 글자가 적혔다.

엄마는 한글을 모르셨다.

영어도 모르셨다.

다행히 숫자는 아셨다.

숫자만 아는 능력으로도 엄마는 광주에서 서울로, 여천에서 분당으로 딸들이 사는 집이라면 어디든 거침없이 돌아다니셨다.

그래서 나는 글자를 해독할 수 없는 엄마가 글자로 이루어진 세상 속에서 살아야 했던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했다.

글자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쳐다보기만 해도 쉽게 이해되는 문자가 엄마에게는 암호처럼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도 해 보지 못했다.

엄마는 만석꾼 집안의 맏딸이지만 1925년생이니 여자에게는 교육을 시키지 않던 풍조 속에서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셨다.

엄마도 가끔씩 당신이 소학교라도 나왔더라면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거라고 한탄하셨다.

한번은 이런 말씀도 하셨다.

신혼살림 하는 둘째 언니를 위해 참기름이며 깨소금이며 콩이며 팥을 바리바리 싸 들고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오신 날이었다.

저녁마다 즐겨 보는 연속극을 틀어 달라고 엄마는 사위한테 부탁하셨다.

연속극을 잘 보지 않아 채널을 모르던 사위는 신문에서 TV 프로그램한을 펼쳐 주면서 찾아보시라고 했다.

"그때 내가 첨으로 우리 아부지를 원망했다야.

소핵교만 댕기게 해 줬어도 사위 앞에서 창피스럽게 이런 멍충이로 살지는 안 했을 것인디……."

그날 이후 엄마는 가끔 신문을 보면서 더듬더듬 글자 일기를 시도하셨다.

그만큼 문자를 깨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그런 마음을 감지하지 못하고 얼른 큰 소리로 대신 읽어 드릴 뿐이었다.

내 일이 바빠 예순 살 엄마의 갈망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때 만약 엄마가 글자를 깨치셨더라면 엄마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멀리 가지 않고 방 안에 앉아 책만 읽어도 그 안에 온 세상이 가득 들어 있다는 희열을 엄마가 아셨더라면.

새벽마다 배달되는 신문만 펼쳐도 그 활자 사이로 바깥세상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저벅저벅 들을 수 있는 감격을

엄마가 아셨더라면 엄마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내게는 당연한 그 행복과 충만함을 엄마도 가질 수 있게 내가 조금만 더 마음을 내었더라면…….

결국 엄마는 엄마의 사진을 둘러싼 낯선 알파벳처럼 끝내 한글을 해독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여권 사이에 넣어 둔 납골당 카드에 '朴順禮'라는 이름을 남겨 둔 채 한 줌의 재로 남으신 것이다.

가신 지 7년이 되어도 재가 될 수 없는 죄책감을 내 가슴에 남겨 둔 채 엄마는 그렇게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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