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김선주 / 한겨레출판 / 2010
국내 어떤 방송사가 티베트의 가난한 마을을 취재했다.
불가사의한 것은 그들이 그처럼 가난한데 행복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항상 기도하고 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두 남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고 말했다.
쪼글쪼글한 주름살마다 환하고 선한 표정이 가득한 중년의 노동자가
나를 뺀 다른 사람과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말하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기도의 올바른 뜻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닌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면 개인의 이해가 상충하기 때문에
조물주도 모든 사람을 만족할 수준의 응답을 해줄 수 없지만,
자신을 빼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것이라는 대답이다.
그들은 그러한 지혜를 어디서 얻었을까.
진정으로 사회의 모순을 느끼는 것은 스스로가 차별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만이 가능하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이별을 경험한다.
싫든 좋든 떠나야 할 때가 되면 떠나야 한다.
세상과의 영원한 이별인 죽음은 어쩔 수 없지만,
우리는 모든 크고 작은 이별의 시간과 장소,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허망하지만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고,
사랑이 떠난 자리를 붙들고 있다고 해서 사랑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므로 고통을 견뎌내야만 한다.
연초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연예인 부부의 이별 과정은 너무나 서글펐다.
단 한 마디, 모두 내가 잘못했다는 말만 했으면 됐을 일이다.
그러나 내 탓이 아니라고 상대방을 비방하고 흠집 내기를 하는 동안
사랑했던 시간들과 그 사랑의 진정성까지도 의심하게 만드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별의 고통을 견뎌낼 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일주일 뒤인가 30년 결혼 생활을 한 미국의 갑부 부부가 이혼하면서 소송도 없이 재산을 합의하에 나누고,
지난 결혼생활은 행복했고 이제 서로 다른 길을 가겠다고 기자회견을 한 것을 보았다.
이별의 고통을 과거에 진정으로 사랑했던 시간에 대한 존중으로 바꾸어낸 것이다.
남녀 사이 사랑만이 사랑은 아니다.
직업과 학문, 예술에 걸었던 열정도 사랑이다.
나라와 겨레, 혹은 어떤 이상을 위해 뭉쳤던 뜨거운 순간들도 사랑이다.
사회적 이슈에 몸과 마음이 아플 정도로 헌신했던 터질 것 같은 순간들도 사랑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런 순간들을 뒤로 하고 헤어져야 할 때가 온다.
사랑의 순간이 뜨거웠을수록 이별의 고통은 크다.
왜 사람들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사랑의 순간들까지도 훼손하는 것일까?
최근 열린우리당의 탈당 사태를 보면서도 이별을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관계가 다르고 꾀하는 바가 다른 정치 집단의 이합집산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처음 당을 만들었을 때의 역사적 소명감이나 명분, 기대,
그리고 서로 손을 마주잡고 부풀어 오르던 일체감의 순간들이 있었을 터이다.
그런 순간들을 기억한다면 이런 방식의 헤어짐이 너무 염치없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싶었다.
10년 전 고향인 경남 진해에 내려가신 사화학자 이효재 선생께 물은 적이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선생님이 필요하다는데 왜 갑자기 낙향하셨냐고.
"어느 순간 내가 한 말을 또 하고, 한 말을 또 하더라.
아차 싶어서 중요한 자리를 맡거나 선두에 나서기에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선생의 답변이었다.
생물학적인 나이와 거기에 따른 노쇠 현상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놀라운 자기억제로 고통의 순간들을 이기고 떠날 시기를 선택한 것이다.
지난 주말 찾아뵈었더니 선생은 진해에 '기적의 도서관'을 유치하고
그곳에서 새로 들어온 책에 스탬프를 찍으며 건강하게 지내고 계셨다.
우리 사회엔 자신의 시대는 지나갔는데도 망령된 글이나 발언을 하는 인사들이 더러 있다.
한때 빛나던 사람들이다.
그 빛나던 순간까지도 추레한 것으로 만드는 것을 보면서
세월에 대한 겸손함이나 염치와 예의를 차리지 않는 아집을 본다.
봄이 지나 여름이 왔는데도 지난봄을 붙잡고 봄은 어떠해야 한다고 말한다.
봄은 다시 오지만 다시 오는 봄은 과거의 그 봄은 아니고 새로운 봄이라는 것을 왜 모를까.
자신이 어떤 시대의 대변자였다고 해서 자기 삶의 모든 시기를 통틀어 시대를 대변하겠다는 것은 만용이다.
슬프지만 인정하고 떠날 때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처음 사랑을 시작할 때 서먹서먹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상대에게 주춤주춤 다가간다.
그 아름다웠던 순간들, 인생에서 많지 않았던 그 뜨거운 사랑의 순간들을 잿빛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우리는 이별을 맞아야 하고 고통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모든 사랑했던 순간들에 대한 예의고 또한 이별의 예의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쟁이나 다툼은 결국 한 개인인 판사에 의해 해석되고 조정되고 판결된다.
하나의 판례는 국민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준거가 된다는 점에서
판사의 인생관이나 가치관,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깊은 고뇌게 반영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판결은 법률 기술자로서의 해석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이 배어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의사도 오진을 하고 기자도 오보를 하는 경우가 있다.
판사도 오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오판을 하지 않으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반성,
자신이 내리는 판결이 사회정의나 평등의 개념에 위배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특정 판사와 특정 판례를 비판하는 것이 사법부의 독립을 해치고 개인의 명예를 훼손할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비판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사법부의 독립은 법관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사법부의 본질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남에게 충고하는 일이고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사람이 누군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정신 속에 그 사람이 지문으로 남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런 지문도 남기지 못하고 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연히 길거리에서 본 어떤 중년의 피곤한 얼굴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 있기도 하다.
단 한 번 만났을 뿐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인데도
정신의 어느 갈피엔가 간직되어 있다가
문득문득 나의 삶에 어떤 중대한 발언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한다.
얼마 전에 한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염하는 분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말을 들었다.
가족도 없이 떠나시는 분이 유언장을 남겼는데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 자신의 몸뚱이를 마지막에 염해줄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돈을 남겼다는 것이다.
염 생활 수십 년에 처음 있는 일이라며 눈물로 정성을 다해 뒷수습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 가는 길에 자신이 사람으로 살았던 모양 그대로,
사람다운 한계를 드러내면서도 사람에 대해 배려하고 떠나는 것이
진정으로 사람의 위대함이 아닐까 생각해본다.